알아봐요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터 이야기

재판소 터의 역사

서울시 종로구 재동 83.
지하철 안국역을 나와 북악산을 바라보며 걷는 것도 잠시, 이내 왼편에 자리한 헌법재판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주독립 국가를 꿈꾼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9차례 개정을 거쳐 1987년부터 유지되고 있어요.

새 헌법 아래 헌법재판소는 1988년 설립되었어요.
그리고 1993년 지금의 자리에 청사를 완공하여 이전했지요.
바로 이곳에서 헌법재판소는 한국 현대사와 헌법재판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어요.

격동의 역사를 품은
헌법재판소 터 이야기

▲ 19세기 초반 김정호가 만든 서울지도,
헌법재판소는 경복궁과 창덕궁사이 북촌에 자리잡았다
(수선전도, 국립민속박물관)

헌법재판소,
조선 5백년의 중심에 자리했어요

재동이란 지명의 유래부터 심상치 않지요?
종로문화원에 따르면 재동은 ‘잿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중신들을 처참하게 죽였는데, 이때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해요.
그러자 사람들이 나와 재로 피를 덮어버렸다고 해서 잿골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이 재동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 땅은 오랜 시간 동안 격동의 중심지였어요.
때는 600여년 전 조선왕조 건국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니 그 이전 고려왕조 시대에 이미 이 주변에는 남경 궁궐이 있었어요.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지요.
새 수도가 필요해진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하여, 우선 경복궁을 짓고 그 옆에 창덕궁을 만들었어요.

이 양 궁궐을 옆에 낀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양반과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어요.
권문세가 주거지로서의 북촌의 위상은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이어졌어요.
김옥균 등 개화파들과 민비의 친인척 여흥 민씨 세력들이 북촌에 많이 거주했답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일제강점기 서울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땅 전쟁을 치릅니다.
일본인 건축업자들은 경복궁 서쪽의 서촌에 문화주택을 짓고, 조선인 건축업자는 북촌에 조선집을 지었지요.
지금도 북촌에는 그때 지은 전통가옥이 줄지어 남아 아름다운 관광지구로 사랑 받고 있어요.
무엇보다 여기에는 구한말 개화파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중후반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를 침탈하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개화파 양반들은 조선을 근대화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았습니다.
개화파는 말 그대로 헌법재판소 터에서 싹이 트고 자라났다고 할 수 있지요.
은퇴한 고위관료 박규수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김옥균 등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세계가 변하는 모습을 알려주었답니다.

이에 젊은 그들은 조선과 중국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들은 급진적 개화만이 조선이 살길이라고 보고 마침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일 천하’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습니다.
하지만 그 개화의 정신은 이후 조선의 방향을 정하고, 지금 한국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어요.

정변의 주역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입니다.
헌법재판소 터에는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이 있었고, 김옥균은 불과 걸어서 5분 거리인 지금의 정독도서관 터에 살았으며, 박영효는 10분 거리 인사동의 저택에 살았습니다.
젊은 혁명가들이 잰 걸음으로 박규수의 사랑채를 드나드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개량 전통 한옥들이 늘어선 북촌 거리

최초의 근대 병원과
근대 여성 교육의 요람이 만들어졌어요

1884년 9월 미국의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갑신정변 때, 정권의 실세인 민영익은 피습을 당해 사경을 헤매게 되었어요.
알렌은 다 죽은 사람을 치료해내어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알렌은 정변의 실패로 집안이 멸문을 당한 후 폐허로 남아 있던 홍영식의 집을 하사 받아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열었답니다.
광혜원은 ‘은혜를 널리 펼치는 집’이라는 뜻인데, 곧 ‘백성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제중원이 용하다는 소문을 들은 수많은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요.
가볍게 다리가 부러져도 한약을 달여 먹고 낫기만을 기다리거나 부적을 써서 병마를 물리치려 하던 시절에, 제중원은 백성들에게 하나의 빛이었지요.

▲ 헌법재판소 부지에 있던 제중원의 모습(1885, 출처 : 연세대학교 의료원)

이후 헌법재판소의 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경기고등여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가 들어서게 됩니다.
여성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던 시대, 남다른 생각을 지녔던 한 교육자의 노력으로 최초의 여학교가 설립된 것이지요.

1908년 종로의 한 한옥에서 작은 학당으로 시작했던 경기여고는 2년 만에 입소문이 났고 규모를 키우며 지금의 헌법재판소 부지로 이사했어요.
당시 교장은 벼슬이나 지위가

높은 집이면 빼놓지 않고 찾아가 대문을 두드리며 “딸을 우리 학교에 보내 달라”며 사정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여성은 외출 시 얼굴과 몸을 가리고 다녔답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짧게 개량한 검은 한복을 교복으로 입힌 것만으로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답니다.
학생들의 회고에 따르면, 공부뿐 아니라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배우며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당당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 교정에서 체조를 하고 있는 경기여고생들(출처 : 경기여고동창회 홈페이지)

경기여고가 1945년 이전하자 뒤이어 창덕여자고등학교가 40여 년 동안 자리함으로써 이 터는 여성 교육의 요람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비좁은 을지로 청사에 세들어 살던 헌법재판소가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재동 백송이
이 모든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이런 600년의 긴 역사를 곁에서 모두 지켜본 존재가 헌법재판소 터에 서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령 백송(白松)인 재동 백송은 지금까지 이 터를 지켜왔어요.

백송은 중국에서만 자라는 데다가 생육이 느리고 번식력이 약하며 성질 또한 예민해 국내에 몇 그루 없는 나무랍니다.
조선시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이 심었다는 설이 유력하죠.

▲ 재동 백송,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높이 15m에 달하는 이 나무는 유난히 흰 껍질을 두르고 크게 두 갈래로 뻗은 웅장한 모습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헌법재판소 건물을 신축할 때도 백송을 지키기 위해 건물을 남향으로 짓는 것을 포기하고 동향으로 지었다고 해요.

1995년에는 돌풍에 북쪽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많은 애정과 관심 아래 백송은 여전히 헌법재판소 옆에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켜온 백송은 앞선 역사를 지켜보았다는 사실 자체로 인간에게 의지가 되며, 우리에게 같은 시기를 같은 곳에서 보내고 있다는 무언의 동질감을 가져다 준답니다.

앞으로도 재동 백송은 희고 고운 모습 그대로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헌법재판소가 써내려가는 무수한 역사를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 현재 헌법재판소 청사